Red Coin (with 레드)
회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런 귀찮은 곳, 가야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때마침 유리와 함께 있던 다른 조직원이 함께 가겠느냐고 물어 그러겠다고 답하고 말았다. 그렇게 날 데려온 주제에 저는 혼자 죽어버리고 말이지. 유리는 제 앞에 놓인 술을 홀짝이며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챙겨줄 정도로 친한 것은 아니어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챙겨주어도 어느 샌가 다시 바닥에 구르고 있을 것이 뻔했다. 유리는 헛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담배가 고팠다. 유리가 그렇게 말하면 그가 골초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분명 비웃을 터였다. 넌 술을 안 마셔도 담배를 달고 살잖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터에 불이 켜지고 곧 담배 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담배의 쓰디쓴 향이 입 안에 맴돌았다. 그렇게 담배를 한 개비, 두 개비 피우며 주변을 둘러보는 유리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특이한 머리색의 예쁜 여자였다. 유리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선 유리를 돌아봤다. 유리는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으며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지나가는 이를 붙들고 술 한 병만 갖다달라고 말하자 그는 옆 테이블에 놓여있던 새 양주병을 건네주었다. 유리는 여자의 앞에서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한 잔 할래요? 여자는 좋아요오, 하고 답하며 자신의 술잔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름이 뭐예요?”
“레드 벨포어예요오. 카지노에서 일해요오.”
“아, 전 유리예요. 주로 마약을 팔죠.”
필요하면 말해요. 반쯤은 농담, 반쯤은 진담으로 그렇게 말을 건네고 유리는 잔을 들어 올려 건배를 했다. 여자는 붉어진 얼굴로도 술을 곧잘 마셨다. 한 번에 잔에 담긴 술을 비우고 내려놓자 유리의 잔에 담긴 얼음이 짤랑거렸다.
“레드는.”
“네에?”
“머리가 이름이랑 참 잘 어울리네요.”
그녀가 유리의 눈에 띈 것은 머리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빛 때문이었다. 머리의 뿌리서부터 이어지는 백금발의 머리와 달리 끝부분은 붉게 염색되어 있었는데, 풍성한 머리칼이 그녀에게 굉장히 잘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유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제스. 머리의 뿌리부터 붉었던 그녀의 머리를 떠올리면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었다.
유리는 이윽고 생각을 지워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그러세요오.”
레드의 대답에 유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끝을 매만졌다. 염색한 것치고는 결 좋은 머리가 손끝에 와 닿았다. 이것보다는 좀 더 거칠었던 것도 같고. 사실은 제대로 신경 써서 만져본 적도 없으면서. 머릿속에 또다시 제시카에 대한 생각이 빙빙 맴돌았다. 유리는 티가 나지 않도록 얼른 손을 떼었다. 레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한 얼굴임에도 굉장히 강한 느낌을 주는 그녀의 인상에 유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미안해요. 머리가 너무 예뻐보여서.”
“괜찮아요오. 그런데에-.”
“네?”
“나 좋아해요오?”
갑작스런 레드의 질문에 유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웃음으로 감추었다. 레드는 그런 그의 인상 변화를 알아챈 듯 했지만 딱히 그것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유리는 턱을 괴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그렇게 몸을 숙이자 레드와 시선의 높이가 비슷해지는 느낌이었다.
“레드가 말하는 게 사랑이라면 나는 그쪽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할게요. 하지만 그게 좋은 동료로서, 라는 뜻이라면 맞아요.”
사실은 유리에게는 모두가 좋은 동료였다. 하지만 좋은 동료일 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어차피 마음을 줘봐야 언젠가는 뒷골목에서 피 흘리며 죽어갈 놈들일 뿐. 유리는 그들에게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처음 만난 레드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사실이기도 했고.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유리가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테이블 위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 아는 얼굴 같아 보였지만 유리는 곧 신경을 끄고 다시 레드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걸까요오?”
“글쎄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유리는 레드의 물음에 답하며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하나 꺼냈다. 레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레드의 시선이 유리를 향했다. 그는 은색 동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저쪽은 신경 끄고, 나랑 게임 한 판 할까요?”
“웬 게임이예요오.”
“아직 술이 많이 남았잖아요.”
그는 저희 앞에 놓인 양주병을 가리켰다. 그래도 땄으니까 다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유리의 말에 레드는 가만히 생각을 하는 듯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오. 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유리쪽으로 몸을 향했다. 레드의 시선 끝에는 동전의 앞면이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이게 앞면이 나오면 레드의 승, 그리고 뒷면이 나오면 나의 승이예요. 진 사람이 한 잔씩 마시도록 합시다.”
“알겠어요오.”
던지는 건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오? 레드의 말에 유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동전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유리가 레드에게 내기를 건 일을 후회한 것은, 세 판 내리 동전의 앞면만 나와 저 혼자 술을 계속 마시게 되었을 때였다. 승리의 여신은 레드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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