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ri Rob 2014. 10. 3. 22:10

검은 폰과 흰 나이트 (with 아이반)


  아, 날씨 좋다. 공원 입구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유리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만히 그늘에 앉아 있으려니 바람이 솔솔 불어와 그리 덥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어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다 살며시 웃었다. 활기찬 주말의 오후는 유리는 꽤나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와있으려나?


  유리는 멍하니 누군가를 떠올렸다. 유리가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생긴 것과 이름 정도뿐이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을 생각도 없었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 있던 유리는 ‘오빠, 이 팔찌 파는 거예요?’하고 물어오는 꼬마에게 고개를 돌리고 웃어보였다. 아이는 유리가 만든 팔찌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 * *




  있네, 오늘은.


  유리는 공원을 가로질러 가다 널따란 돌에 앉아 어떤 노인과 체스를 두고 있는 아이반을 발견했다. 그걸 그렇게 움직이시면 안 되죠. 아이반은 웃으며 노인의 검은 폰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유리는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아, 왜! 한 번만 봐줘!”

  “승부는 냉정한 겁니다.”


  자, 얼른 다시 하세요. 아이반은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리고 제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유리와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어보였다. 유리는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할아버지, 오랜만이예요.”

  “엥이, 말 걸지 말아봐. 집중이 안 되잖아.”

  “아이반 씨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안부를 묻는 유리의 말에 아이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으로 체스판을 힐긋힐긋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잘 지냈어?”

  “그럼요. 제가 뭐 딱히 바쁘거나 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하긴, 그렇지?”


  아이반과 유리가 서로를 보며 짧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노인은 계속해서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유리는 아이반과 이야기를 하느라 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체스판을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이미 한참 승부를 하고 난 뒤인지 판 위에는 검은 말이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노인이 질 것이 뻔한 판이었다.


  노인의 손녀가 제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 때였다. 할아버지이……. 엉엉 울며 제게로 달려오는 손녀를 발견한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여자 아이를 달래는 노인을 보던 아이반은 픽, 하고 웃고는 유리에게 제 맞은편에 앉기를 권했다. 유리는 자리를 옮겼다.


  “원래 저렇게 자기 손녀한테 자상하게 구는 양반이 아닌데 말야.”

  “그래요?”

  “지기 싫어서 도망치려는 이유도 요만큼은 있었을 거다.”


  아이반은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아주 작은 틈새를 만들어보였다. 유리는 그런 아이반을 보고 웃다가 고개를 숙여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아이반은 물었다. 니가 마저 할래?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 체스 잘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가르쳐 준 것도 그쪽이면서.”

  “못 본 사이에 한 번도 안 뒀어?”

  “제 주변엔 체스 둘 줄 아는 사람도 없고, 체스판도 없어서요.”


  이번엔 유리가 팔짱을 꼈다. 체스판 위에 몇 남지 않은 검은 폰들이 쓸쓸해 보였다. 그에 비해 하얀 말들은 몇 개씩이나 폰들을 감싸고 있었다. 아이반은 손을 뻗어 검은 폰을 한 칸 앞으로 움직였다. 유리는 가만히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뭐, 사실 계속 해봤자 질 게임이긴 했어. 그 양반, 좀 막무가내로 두는 경향이 있더라고.”

  “그랬어요?”


  흰 말이 걸음을 옮겨 검은 폰을 잡아들었다. 창에 찔린 검은 병사는 옆으로 나뒹굴었고, 커다란 손이 그것을 집어 들어 자신의 앞에 두었다. 검은 편은 점점 패색이 짙어져가고 있었다. 유리가 손을 들어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검은 폰을 한 칸 다시 앞으로 옮겼다. 아이반은 ‘이제 할 생각이 든 거야?’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나이트를 옮겼다. 흰 말은 종횡무진 체스판을 누비고 다녔다.


  승부가 난 것은 유리가 게임에 끼어든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이반의 말대로, 애초에 검은 편이 이기기 어려운 게임이었다.


  “체크메이트.”

  “이런.”


  유리는 아쉽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였다. 아이반은 웃으며 흰 말로 하여금 검은 왕에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왕이 쓰러지고, 그는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어 여왕과 다른 기사들이 아이반의 손에 의해 잡혀갔고 판 위에는 덩그러니, 폰 하나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것을 먼저 집어든 것은 유리였다.


  “왕이 잡혀가면 다 잡혀가야 하는 건가요?”

  “뭐, 그렇지. 왕이 없으면 나라도 없는 거니까.”

  “그럼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면?”


  이렇게 말예요. 유리는 폰을 제 등 뒤로 쏙 숨겼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차라리 흰 나라에 망명을 신청하지 그래?”

  “그럼 받아주나요?”

  “그럴 리가.”

  “그럼 도망가는 게 낫겠네요.”


  유리는 검은 폰을 제 주머니 속에 쏙 넣었다. 아이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머지 말들을 정리해 체스판 위에 다시 세웠다. 아이반은 손으로 체스 판 위의 빈 자리를 가리켰다. 그것은 유리가 갖고 있는 폰이 서야할 자리였다.


  “다시 승부해서 이기면 도망치는 것을 허락해주지.”

  “오, 좋은 조건인데요, 그거.”


  검은 폰이 다시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유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체스판을 들여다보았다. 곧 이어 흰 말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고, 유리도 천천히 손을 옮겼다.


  승부는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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