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with 샤론)
1.
진 헤이든에게 있어 군대는 기회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타오에는 재능이 있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진 정도의 두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는 번번이 장학금 신청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가난한 남자가 장학금 없이 대학교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도 그가 공부를 그만두고 일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꿈을 접어야 하나, 하던 찰나 귀에 들려온 것은 코로나에서 연합군을 모집한다는 소식이었다.
우습게도 진은 연구보다는 전투 쪽에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 말해 딱 1년을 빌렸다. 그는 그 동안 연합군에 들어가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고, 총과 검의 사용법을 익혔다. 그리고 연합군에 합격하자마자 진은 코로나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2년 만에 모든 과정을 마치고 군으로 복귀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밤낮없이 공부했고, 결국은 다시 군으로 돌아왔다. 진의 앞에는 많은 연구과제들이 있었으나 애초부터 그의 목표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어머니를 위한 의족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은 부상자가 많은 군에서도 꼭 필요로 하는 연구 과제였다.
전투와 병행하며 연구를 계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연구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진은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며 엑스와 싸워야했다. 그 즈음, 진은 동갑의 용병을 만났다. 처음 만난 이에게 무엇이 그리 끌렸는지 그는 제 마음속의 고민을 툭 하고 던져놓았다. 군인으로서의 어려움. 연구원으로서의 어려움. 그리고 제 고민을 듣고 난 후 그녀는 부럽다는 말을 했다. 맥이 탁, 하고 풀려버렸다.
“뭐랄까. 멋대로 지껄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힘들어할 수 있는 것이 부럽다고나 할까…, 난 선택지가 없었거든요, 이것 밖에.”
진은 물끄러미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밤하늘 아래에서, 여자의 눈은 별보다 더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전장만 보고 거지같이 목메는 일 밖에 없어서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다른 일을 하면서 그것에 힘들다고 말해본 경험이 없네요. 뭐냐, 그 익숙하지 않은 다른 일을 해본 적 자체가 없으니까.”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기도 했지만 또 어찌 보면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다. 다행인 점은 그녀가 단번에 제 재능과 가까운 길을 찾아냈다는 것이었고 안타까운 점은 용병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볼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진은 문득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뭐, 그거야 헤이든 씨 본인이 각오해야할 문제네요. 그건 누가 뭐라고 해도 선택하고 적응하는 것은 당신이니까 말이죠.”
그 대신 전투 면에서 조언을 해줄게요. 그녀는 진을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진은 그녀에게도 다른 기회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진 헤이든이 샤론 블랜디드에게 입대를 권한 이유였다. 군이 자신에게 기회가 되어주었듯 샤론에게도 기회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비록 그것이 썩 좋은 길은 아닐지라도 샤론이라면 잘 선택하리라 믿었다. 그녀는 현명하고, 또 강한 여자니까. 진은 손끝으로 카엘룸 지원서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문질러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더 잘 헤쳐 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
2.
카엘룸은 승리했다. 아니, 이것을 승리라고 불러야 할까. 참으로 뒤끝이 씁쓸한 싸움이었다. 카엘룸에 승선한 이후부터 느꼈던 위화감이 눈앞에 확연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덮었으면, 그래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면 더 좋았을까. 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구에서도 그렇듯 진실은 언제나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었다. 비록 그것으로 인해 그의 길이 무너질지언정, 진은 잘못된 길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밝혀냈던 것이다.
거짓으로 가득 찬 전투가 끝난 후 진은 많은 동료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함장이었던 레오와 몇 안 되는 이들뿐이었다. 진은 그들의 결정을 이해했다. 처음에는 그 또한 군대를 떠나자고 생각했다. 모은 돈은 많았고, 그동안 해온 것이 있기에 어디에 가든 새로운 자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거짓 영웅이 아니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충분히 많았다.
하지만 진은 그 자리에 남았다. 군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듯, 그 또한 군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바뀔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기회. 그 일을 모두 마치면, 그 때야말로 군을 그만두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그리고 소중한 이와 함께 살아가자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는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보다 더 열심히 그는 살아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샤론의 소식을 들었다. 블랜디드 소령도 군을 그만둔다지. 레오는 그렇게 말했다. 진은 그로부터 서류를 받아들었다.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안타까운 것과는 별개로, 참으로 그녀다운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진은 덤덤하게 답했다. 레오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을 건가? 군에.”
“그렇습니다.”
진의 대답에 레오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힘든 싸움이 될 거야. 레오는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보지. 수고하십시오. 레오가 떠난 자리에 진은 홀로 남았다. 그는 서류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마지막으로 샤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언제더라. 그건 분명 유로에 정박했을 때였다.
‘진급 축하해, 블랜디드 소령.’
잘 해나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자신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억지로 안 맞는 길에 끌어들여 시간만 낭비하게 하고 말았다. 이제 다시 용병으로 돌아가는 걸까. 진은 24살의 샤론을 떠올렸다. 그 용맹하고 당당한 모습을 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로 남들을 이끄는 샤론은 참으로 멋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편이 그녀에게 더 잘 어울렸는지도 모른다.
진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욕심으로 그녀를 군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는 했지만 그에게 기회인 것이 그녀에게도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진은 다시금 서류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서류를 처리해 샤론을 군에서 해방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면, 밥을 한 끼 사야지. 그러면 호탕한 그녀는 웃으며 그를 용서해줄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들에게 있어 그런 절차는 필요 없었다. 샤론은 진을 탓하지 않을 것이며, 진 또한 샤론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진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샤론이 알면 바보 같다고 욕할 정도의 책임감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고 하는 것은 거짓이었다. 진은 마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이유는,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3.
진은 샤론이 떠난 후 손에 들린 옅은 크림색의 봉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이 아는 샤론이라는 여자는, 가만히 앉아 편지를 쓰고 있을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임시로 마련된 제 집무실로 돌아와 봉투를 뜯었다. 가만히 앉아 샤론이 정성스레 써내려간 편지를 읽던 진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녀가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간지러움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진은 그 속에서 ‘샤론’을 느꼈다. 항상 강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도, 간질거리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는 그녀도 모두 샤론이니까.
“……답지 않네.”
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고는 또다시 위로 올라갔다. 몇 번이고 편지를 읽고 나서야 그는 편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기쁨이 옅어진 후에는 의문만이 남았다.
어째서, 지금인가.
그는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그 또한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길을 걷기로 결정한 이상, 진이 자신의 마음으로 그녀를 옭아맬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샤론은 언제나 자유로워보였다. 그래서 조용히 그녀를 보내주자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하지만 답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이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가 먼저 마음을 전했으니 자신 또한 그녀에게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은 책상 서랍을 뒤져 분홍빛의 편지지를 꺼냈다. 작년 어머니의 생일에 편지를 쓰고 남은 것이었다. 편지를 보면 샤론은 분명 웃으리라. 어울리지 않게 무슨 분홍색이냐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진은 그녀의 페리도트 빛 머리를, 호박색의 눈을 떠올리며 편지를 써내려갔다. 그녀가 그렇게 했듯, 솔직한 마음이 편지에 담겼다. 마지막 점이 툭, 하고 무겁게 찍혔다. 그것은 그의 마음의 무게였다.
4.
하지만 그의 마음이 담긴 분홍빛의 편지는 전해지지 못했다. 샤론이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그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편지는 진의 서랍 속에 갇혔다. 전하지 못한 마음과 같이.
5.
시간이 흐른 뒤, 진은 잘 봉해두었던 편지 봉투를 뜯어 한 문장을 더 추가했다.
보고 싶어, 샤론.
그것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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