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 Hayden

커피 한 잔 (with 트립)

cha1 2014. 8. 24. 10:46


  갑작스런 호출이었다. 논문 발표회를 위해 찾은 코로나였으나 군의로서의 진 헤이든 소령이 필요했던 상부는 늦은 새벽에 그를 소환했다. 아무리 저의 연구 분야가 ‘기계로 사람의 신체를 대신하는 것’이라 해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이는 저 말고도 많았다. 그러니까, 이 수술을 굳이 제가 할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름 모를 하사 하나가 전투 중에 다쳤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름 모를 하사일 뿐인 그가, 실제로는 장군인 누군가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지만 아들은 다리 하나를 잃은 채로 돌아왔다. 전투에는 썩 재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코로나에 와있는 진 헤이든 소령을 찾아 아들의 다리에 최고의 의족을 달아주기를 원했다. 보통은 그럴 경우 맞춤형 의족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는 군인이었고, 한시라도 빨리 전장에 복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행히도 사이즈가 딱 맞는 의족을 찾아낼 수 있었고, 다음은 수술을 안전하게 마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급히 이뤄진 수술이었다. 


  진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수술실을 나섰다. 똑같이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한 간호사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에게로 다가왔다.


  “수술 끝났나요?”


  그것은 명백히 저를 향한 물음이었다. 진이 고개를 들자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 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아마 내일쯤이면 눈 뜰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청년은 진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진은 그제야 남자의 머리색이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남색인 것을 알아차렸다. 새벽에도 병원 복도를 비추는 조명은 밝았다.


  “그럼 전 이만.”

  “아, 네. 죄송합니다.”


  트립은 그제야 자신이 진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단 것을 알아차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고 보니. 진은 복도를 걷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제야 청년이 연합군의 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데군데 더럽혀져 있긴 했으나 자신이 항상 입던 옷을 못 알아보다니 많이 피곤하긴 한 모양이라고, 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눈이라도 좀 붙여야했다.






  “어, 안녕하세요, 선생님.”


  또 그 청년이었다. 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예, 안녕하세요, 하고 가볍게 답하곤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어제 수술을 무사히 마친 남자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 잠만 자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진은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마다 정신 차리는 시간은 다르니까요. 문제는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상이 없다면 자신이 더 할 일은 없다. 그대로 다시 병실을 나서려던 진은 선생님, 하고 다시금 저를 부르는 청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청년은 웃으며 어느 샌가 따라둔 커피 한 잔을 내밀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셔서요. 잠깐 앉았다 가세요.”


  잠도 거의 못 주무신 것 같고.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눈가 아래에도 거뭇거뭇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뭐, 별로 급한 일도 없고. 잠깐 시계를 바라본 진은 청년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커피를 받아들고 잠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밤새 여기 지켰어요?”

  “아, 네. 보조침대에서 잠도 좀 잤어요.”

  “그런 거 치곤 그쪽도 피곤해 보이는데…….”


  진의 배려하는 듯한 말투에 트립은 작게 웃었다. 웃는 표정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트립, 트립 루시엔입니다. 편히 불러주세요.”

  “아, 전 진 헤이든이라고 합니다.”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확실히 군인이라 그런지 손이 다부졌다. 트립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묘한 표정을 짓곤 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진이 연구원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인 전투 실력 없이는 군인이 될 수 없었다. 트립 또한 그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군인이세요? 검이든 총이든, 무기를 쥐어본 손이시던데.”

  “네,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어요.”

  “아, 전 의사 선생님이신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청년은 굉장히 예의가 발랐다. 아녜요, 그럴 수도 있죠. 진은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곤 트립이 건네준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커피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피곤할 때면 도움이 꽤 되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먼저 다시 말을 걸어온 것은 이번에도 트립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사교성 있게, 그러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을 잘 붙이는 것으로 보아, 성격이 꽤나 좋은 이인듯 했다.


  “저, 뭐 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네,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제 친구 말예요, 이렇게 의족을 달면 다시 군인으로 돌아오지는 못하나요?”


  트립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는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진은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있었다.


  “아뇨, 재활훈련을 열심히 하면 다시 복귀할 수 있을 거예요. 요즘은 의족도 많이 좋아져서, 조금만 익숙해지면 보통 자기 다리처럼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니까요.”

  “아,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어보였다. 진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목 뒤로 삼켰다.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커피 잘 마셨습니다.”

  “뭘요.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 환자분 깨어나시면 호출 부탁드릴게요.”


  진의 말에 트립은 웃으며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군인인데, 복귀 안 해도 되는 건가. 갑자기 그런 궁금증이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알아서 잘 하겠지, 뭐. 진은 트립의 배웅을 받으며 병실을 나섰다. 전투에는 썩 재능이 없어도 좋은 친구는 사귄 모양이라고, 진은 병원의 복도를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트립에게 한 말에 거짓은 없었지만, 굳이 덧붙이지 않은 말은 있었다. 아무리 의족을 달았다고 해도 그냥 열심히 재활 훈련을 하는 정도로는 군인으로 복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그가 버틸 수 있을는지. 사실상 군인으로 복귀하는 이는 10%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만큼 어려운 길이었다.


  하지만 곁에서 트립이 도와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도 같았다. 그는 피곤한 와중에도 밝게 웃어보였고, 곁에서 친구가 재활 훈련에 최선을 다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단 한 번뿐인 만남이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진은 너스 스테이션에 들러 호출이 오면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한 후, 휴게실로 들어가 소파에 누웠다. 트립과의 만남은 딱 커피 한 잔 만큼의 여유를 그에게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