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ri Rob

사랑이 아니라면 (with 제러마이어)

cha1 2014. 10. 3. 22:24


  방문이 닫혔다. 제러마이어는 끝까지 유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유리는 가만히 시선을 옮겨 침대 옆 탁자에 놓인 것을 바라보았다. 제가 언젠가 주었던 팔찌와 막대사탕. 맥이 풀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멍청한 사람.


  손을 뻗어 사탕을 집어 들었다. 우습게도 제러마이어는 유리가 사탕을 좋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련한 사람. 바보 같은 사람. 경찰들은 머리 좋다더니, 하나도 안 똑똑하잖아. 유리는 사탕을 집어던졌다. 커다란 사탕이 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무릎 위에 앉아 있던 톰이 그 소리에 놀라 울었다. 유리는 그제야 고양이가 제 곁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언젠가 저희 집에서 보았던 톰의 사진이 떠올랐다. 너 진짜 뚱뚱하구나. 유리는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곤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


  유리는 그대로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덮고 몸을 웅크렸다. 몸도 아프고, 옷도 없고, 그러니까. 하루만 더 의지하자고 생각했다. 저를 좋아해주는 이를, 진심으로 봐주는 이를 배신하는 건 그만두자고. 더는 상처 입히지 말자고. 유리는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침대는 하나도 따뜻하지 않았다.






  유리는 단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을 사귀는 것과 사랑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건 유리뿐만 아니라 그와 사귀었던 이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유리의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누군가는 유리의 일이 좋아서, 누군가는 지알레로서의 유리가 필요해서 그에게 다가왔다 곧 멀어졌다. 유리는 그들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원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또한 필요에 의해 제게 주어진 호의에 비슷한 정도의 답례를 해주었다. 그것이 유리가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밑바탕이자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제러마이어에게도 마찬가지였을 뿐이었다. 그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어 유리는 제가 만든 악세사리로 답했다. 먹을 것을 주었으니 밥을 만들어주었고, 호텔에서의 빚도 곧 갚을 생각이었다. 제가 지알레인 것을 들키지만 않았다면, 유리는 톰의 장난감을 사들고 제러마이어를 찾았을 것이다. 톰은 잘 지내요? 저번에 맛있는 저녁 사주셨으니, 이건 답례로. 그렇게 말하며 장난감을 건네면 제러마이어는 거절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그랬어야만 했는데.


  그는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깨어졌다. 톰의 장난감 대신 제러마이어의 손에 쥐어진 것은 유리의 배신이었다. 배신이라니.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니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으나 유리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건 배신이었다. 제러마이어의 호의를 호의로 갚지 못하고 상처로 대신한. 그래서 유리는 그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제 가슴이 무거운 것은 제러마이어가 지워준 빚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에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음에도. 유리는 멍하니 집에 앉아 쥐 모양의 고양이 장난감을 바라보았다. 전해주지 못한 답례가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유리에겐 너무나도 무거운 빚이었다.


  제러마이어를 골목에서 다시 만났을 땐 영락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의 표정을, 말들을 유리는 잊지 못했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자신은 굉장히 지쳐있었다. 유리가 지알레고, 비싼 약을 많이 들고 다니지만 혼자일 때가 많다는 것을 안 다른 조직의 마피아들과 싸우다 겨우 도망친 참이었다. 죽으면 빚을 갚을 수 있는 걸까. 상처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유리는 갑자기 저를 들쳐 메고 차에 태우는 제러마이어의 행동에 당황했다. 장소를 옮기려는 걸까. 잠시 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리는 그것도 괜찮았다. 아무래도 골목은 사람을 죽이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니까. 신경질적으로 차를 모는 제러마이어는 굉장히 화가 난 듯 했다. 유리는 일부러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 제러마이어에게 진 빚이 너무나도 많아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힘이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제러마이어의 집이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그는 유리를 제 집에 데리고 오자마자 다시 예전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늦었으니까 자고 가요. 유리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해요. 그렇게 말한 제러마이어는 끝까지 유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가 나가고, 유리는 가만히 시선을 옮겨 침대 옆 탁자에 놓인 것을 바라보았다. 제가 언젠가 주었던 팔찌와 막대사탕. 맥이 풀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는 단 한 번도 유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풀어준 적이 없었다. 제가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저 스스로에게 호의를 갚으라 종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정말로 좋아할 수 있는 걸까.


  멍청한 사람.


  해가 중천에 떴다. 유리는 제가 쓴 침대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에 가만히 앉아있던 톰이 유리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유리가 뒤를 돌아본 건, 제러마이어의 빌라를 나서기 전이었다. 현관에 서서 신발을 구겨 신고 넓지 않은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었다. 아니, 오지 말아야할 곳이었다.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었다.






  “왜 안 갔어요?”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 제러마이어가 서있었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리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휴지통으로 시선을 돌렸다. 깨어져 산산이 부서진 사탕 조각들이 보였다. 제가 아침에 치운 것이었다.


  “나는,”


  말을 해야 했다. 유리 또한 제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제러마이어를 기다린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모르는 척 했다. 하지만 문 밖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 유리는 그곳을 떠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빚이 그를 다시 짓눌렀다. 그래서 다시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결심이 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약을 팔아요.”


  그리고 가끔은 내가 하기도 해요. 유리는 아직도 그 감각을 잊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잡지 못했던 선명한 무지개를. 그건 그에게 유일하게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제시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머리의 제시카와 제러마이어는.


  “나는 배운 적이 없고, 계속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라 지알레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이번에는 유리가 제러마이어를 쳐다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제시카가 죽은 이래로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한 번 입을 열자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제러마이어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

  “당신 같은 사람이 왜 날 좋아하는지.”


  번듯한 직업도 있고, 일도 잘 하잖아요. 나는 사람도 많이 죽였어요. 어제 당신의 동료였던 사람을 죽인 사람이 나일지도 몰라요. 내일 또 그렇게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래서,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감정인 것 같아요.”


  제러마이어는 답이 없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유리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기서 그만두어야했다. 나를 좋아하지 말라고. 유리는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제러마이어의 집을 나갈,


  수 없었다.


  “근데,”


  그는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말들을 멈추지 못했다. 그의 말이 홍수처럼 흘러넘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유리는 제러마이어의 화난 표정이, 날카로운 말들이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들이 제러마이어뿐만 아니라 저를 상처 입히는 이유를 생각했다. 유리가 제러마이어에게 편히 의지하려 했던 건 사실 그의 호의엔 다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답을 하려 했다. 익숙해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 정체를 모르는 제러마이어는 그래도, 그가 CSP임을 아는 자신은 그러면 안됐다. 하지만 그걸 깨달은 순간 유리는 이미 그에게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호텔 방에 나란히 누워 입을 연 순간 유리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모르는 척 해왔을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제러마이어가 멍청한 사람이라면 자신은 나쁜 사람이었다. 이 관계에서 득을 보는 사람은 유리뿐이었다. 제러마이어라는 사람에게도, CSP로서의 그에게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폐만 끼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옆에 있을게요.”


  유리는 제시카를 생각했다. 이대로 제러마이어를 잃을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잃고 상처를 받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그것이 빚이 아니라 상처라는 걸 안 이상, 유리는 제러마이어를 놓을 수 없었다.


  “아니, 옆에 있고 싶어요.”


  그러게 해줘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제러마이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리는 없을 테니. 그러니 그에게도 충분한 보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