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ri Rob

볶음밥과 고양이 (with 제러마이어)

cha1 2014. 10. 3. 22:17


  여느 때처럼 약을 팔고 있던 밤이었다. 이게 다야? 남자들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돈 더 가져오면 더 줄게요. 남자들은 유리보다 키도, 덩치도 모두 다 컸지만 그를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그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리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건 그 때였다. 그리고 뒤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거기! 유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남자들에게 말했다. 얼른 가요. 남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사람 C.S.P라구요.”


  잡히고 싶으면 여기 있던가. 우습게도 이곳에서 가장 당당한 것은 지알레인 유리였다. 남자들은 그런 유리를 잠시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어쨌든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황급히 뒤로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제러마이어 씨.”

  “어디 다친 덴 없어요?”


  밤중에 왜 이런데서……. 그는 유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러마이어의 손에는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유리는 그것을 내려다보다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네, 뭐. 사실 자신이 위험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속에 칼을 품고 있는 것은 건달인 남자들 쪽이 아니라 마피아인 유리 쪽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굳이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놈들이 뭐라고 했어요?”

  “아니, 뭐 그냥…….”


  약을 달라고 했죠. 그래서 줬고. 유리는 말을 뒤로 삼켰다. 제러마이어는 제멋대로 유리의 답을 예측하며 혀를 찼다. 혹시 돈 빼앗겼어요?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제러마이어 씨 보고 도망가던데요. 경찰 옷도 안 입었는데 어떻게 알고 도망갔을까.”

  “제가 좀 덩치도 크고 사납게 생겼잖습니까.”


  어쨌든 아무 일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제러마이어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붉은 머리가 유리의 시선에 담겼다.


  “집 어디예요?”

  “네?”

  “데려다드릴게요. 집까지.”

  “안 그러셔도 되는데…….”


  유리의 거절에 제러마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또 혼자 가다가 아까 그 사람들 만나면 어쩌려구요. 진짜 괜찮은데. 그렇게 거절을 하던 유리는 자신을 곧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제러마이어와 눈을 마주치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을 알려주는 건 별로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고마워요. 유리는 그렇게 답하며 제러마이어를 올려다보았다. 지지직. 지직. 유리가 발걸음을 옮기자 앞에 보이던 가로등이 깜박였다. 하지만 이 골목에서 그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맥주 사러 나오신 거예요? 제러마이어의 손에 들린 봉투를 보며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웃었다. 집이 멉니까? 아뇨, 금방이예요. 등 뒤에서 다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 그리고 또 좁은 골목을 지나면 그곳에 유리의 집이 있었다.






  유리는 방으로 들어서며 불을 켰다. 단 하나의 불빛만이 좁은 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저 밥 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요? 유리의 제안에 제러마이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혼자 밥을 먹으면 쓸쓸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유리는 그런 그의 대답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거기 아무데나 앉아 계세요. 유리는 작은 냉장고를 열며 텅 빈 방을 가리켰다. 유리의 방에는 작은 침대 하나, 베드 사이드 테이블 하나, 옷장 하나, 그리고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작은 상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유리는 방을 둘러보다 조심스레 침대 옆에 앉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볶음밥 할 건데, 괜찮으세요?”

  “아, 네. 조금만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많이 줄 정도로 뭐가 많지도 않아요. 유리는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꺼냈다. 당근, 피망, 그리고 버섯. 이것저것 잘게 썬 뒤 남은 찬밥과 함께 볶았다. 밥은 금세 완성되었다. 그는 프라이팬과 수저 두 개를 들고 와 제러마이어에게 상을 좀 펴달라고 부탁했다.


  “뭐 별 건 없지만 그래도 배 채울 정도는 될 거예요.”

  “잘 먹겠습니다.”


  제러마이어는 유리에게서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그가 만든 볶음밥은 부실해 보이는 것에 비해 맛이 꽤 괜찮았다. 맛있어요? 유리의 묻는 말에 제러마이어는 입에 있는 것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많이 드세요.”

  “유리 씨도 많이 드세요.”


  유리 씨 저녁이잖아요. 제러마이어의 말에 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안 말해도 많이 먹을 거예요. 그 후로 제러마이어와 유리는 말없이 밥을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프라이팬이 바닥을 보일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유리였다. 톰은 잘 지내요? 제러마이어는 수저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잘 지내죠. 아주. 사진 볼래요?”

  “네.”


  제러마이어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사진첩을 열어 회색 고양이를 유리에게 보여주었다. 자, 봐요. 살 많이 쪘죠? 핸드폰 속에는 전에 보았을 때보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밥을 얼마나 주신 거예요?”

  “회사 가 있을 땐 못 챙겨주니까 많이 내놓고 갔더니 그걸 맨날 다 먹더라고요. 이 사진도 좀 봐요. 완전 돼지라니까요.”


  이름을 돼지라고 개명할까보다. 제러마이어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푸, 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도 잘 크면 좋죠.”

  “뭐, 하긴 그렇죠.”


  다른 사진은 또 없어요? 유리의 말에 제러마이어는 사진을 또 옆으로 넘겼다. 그의 핸드폰에는 톰의 사진이 잔뜩이었다. 돼지니 뭐니 해도 예쁘긴 예쁜 모양이었다. 이 톰과 제리는 싸우지 않고 잘 지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한참동안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로 톰의 사진을 구경했다. 볶음밥이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